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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매너연구소25.03.27
아파트 앞에서 딸기 트럭 장사를 하는 엄마(길해연)를 찾아온 민정(안현호)은 ‘딸기 떨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마는 “떨이가 왜? 있는 사람들이 더 싼 것만 찾아”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민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올해 마지막 딸기’로 문구를 바꾼 후 자리를 떠난다. 이후 딸기 트럭에는 “올해 딸기 별로 못 먹었는데”라는 손님들이 몰려든다.
지난 16일 시청률 7.1%(닐슨코리아 전국)를 돌파한 ‘협상의 기술’의 4화 도입부 장면이다. 약 2분 30초가량의 이 짧은 장면은 실제 아파트에서 벌어진 일인 듯 과장 없이 펼쳐진다. 연출자 안판석 감독(64)은 일상 속에서도 협상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드라마의 기획 의도,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 공감을 이끌어야 한다는 연출 철학 등을 이 한 장면에 압축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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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JTBC 사옥에서 만난 안 감독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딸이 바꾼 문구를 카메라에 바로 담지 않고, 몰려든 손님들 사이로 딱 드러나도록 연출했습니다. 그래야 궁금하고 재밌잖아요.” 그랬다. 안 감독은 38년째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협상을 거듭해 온 ‘협상의 기술자’. 드라마는 배우 캐스팅부터 편집까지 시청자에게 어떤 장면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놓고 협상이 반복된다. 그렇게 JTBC ‘밀회’·‘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MBC ‘하얀거탑’·‘봄밤’, SBS ‘풍문으로 들었소’, tvN ‘졸업’ 등을 연출했다.
M&A(기업의 매수·합병) 세계를 파고든 ‘협상의 기술’은 엘리트 의사 이야기를 다룬 ‘하얀거탑’과 결이 비슷하다. 주인공의 러브스토리 없이 집단 내에서의 교묘한 암투로 극을 끌어간다. 주인공은 ‘백사’라 불리는 전설의 협상가 윤주노. 배우 이제훈이 연기한 백발의 피부 미남 윤주노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외모의 소유자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다소 불친절한 태도에 ‘냉혈한’, ‘사이코패스’라는 소문이 났다.
안 감독은 “드라마 조언을 해준 M&A 전문가가 백발이라 언제 머리가 그렇게 됐느냐 물으니 30대 초반에 그랬다더라.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싶었다. 동시에 회장부터 신입까지 다 만나는 직업의 특성상 백발로 나이 숨기며 돌아다니기 딱 좋을 것 같아, 이제훈에게 백발 분장을 권했다”고 말했다. 또 “이제훈이 주식 투자에 관심이 많고 똑똑한 것이 윤주노와 닮았다”고 덧붙였다.
윤주노를 고용한 산인그룹 회장 송재식 역의 성동일에게는 연기에 자유를 줬다. 성동일은 실제 친분이 있는 모 회장의 행동과 말투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한다. 안 감독이 “극에 달라붙어 연기한다”고 평하는 ‘안판석 사단’ 배우들, 장현성·김학선·오만석·허정도·길해연 등도 합류했다.
현실에 발을 붙인 캐릭터들이 만들어지자, 안 감독은 연출에 속도를 냈다. “머릿속에 잡히는 편집점을 따라 재미있게 촬영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재밌는 이 드라마를 빨리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가슴을 치며 기다렸다”고 했다. 좋은 스토리, 재미있는 캐릭터를 갖추니 “이건 한 시즌으론 아쉽다. 후반부의 긴박감을 더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 감독의 연출 참고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40대에 이 책을 깊게 파고든 그는 “인간은 보편적 감정을 느낀다. 시대와 현실을 반영한 드라마는 한 편의 문학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하얀거탑’을 만들었다. 안 감독 특유의 ‘극사실주의 연출’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모든 드라마는 사실에 입각해 연출해야 한다. 비현실적인 스토리라도 정말 디테일하게 풀어놓으면, 역설적이게도 그 리얼리즘에 빨려 들어간다”고 했다. 이어 “모든 드라마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면서 저마다 ‘착하게 살자’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건 드라마가 우리네 삶을 반영한 문학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문학이 가고 영상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60세가 넘어 ‘졸업’에 이어 ‘협상의 기술’을 꺼낸 안 감독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연출의 본질을 이해했다.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에게 ‘나도 제대로 좀 살아보자’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